본문 바로가기

가을-문화공간/단순한 호기심

비담, 출생의 비밀과 상대등이 된 경위는?


 


비담의 출생


출생 연도, 부모 등 출생에 대한 사항 및 업적 등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전혀 없다.
 
미실의 아들이라는 것도,
폐위된 진시왕의 아들이라는 것도,
문노가 키웠다는 것도
모두 작가의 상상력일 뿐이다.

진골 귀족들의 수장좌이자 신라의 최고 벼슬인 화백회의 상대등에 오를 만큼의 당대 최고위 귀족이었지만, 반역을 꾀한 죄로 역모에 대한 내용을 제외한 다른 기록들은 모두 파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비담이 왕실 서고에서 자기의 출생의 비밀을 찾아낸다. 그러나 역사서 어디에도 비담에 대한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비담은 진골이었다???


상대등 비담의 치적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상대등이 귀족세력을 통솔 대변하여 국사를 총관하는 관직이고, 종권과 귀족세력의 조화와 통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점에서 가장 요직이었을 것이다.
비담의 반란 시의 상황으로 보아 상당한 세력기반을 지닌 것에는 틀림없다.
비담은 출신을 잘 알 수 없으나, 귀족세력의 대표로서 왕위계승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 반란을 도모한 것으로 보아 골품은 진골이었으며 성은 김씨일 것으로 추측된다.


비담이 미실의 아들이었다는 근거는 아무곳에도 없다.
그래서 작가는 글을 통해 비담이라는 인물을 자유로 구상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상대등이 되었다는 것과 난을 일으킨 사건 이외에는 전혀 기록이 없으니까....조연으로 각색하기에 충분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비담의 생애


신라 제 27대 임금인 선덕여왕 재위 말기
645년(선덕여왕 14년) 화백회의의 수장인 상대등이 되었다.

647년(선덕여왕 16년) 정월, 비담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을 일으킨 지 10여일 만에 진압당했다.
난을 도모한 30여명의 진골 귀족과 함께 잡혀 죽임을 당했다.
비담의 가계는 구족(九族)이 멸하였다



비담의 가계라고 한 것으로 보아 분명 비담은 고아는 아니었다. 또한 결혼도 하고 자손이 있었을 것이다.

구족을 사전에서 찾아보자.
①고조, 증조, 조부, 부친, 자기, 아들, 손자, 증손, 현손까지의 직계②부족의 넷, 모족 셋, 처족 등을 일컬음
③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모의 자녀, 장인, 장모, 고모의 자녀, 자매의 자녀, 딸의 자녀 및 자기의 동족

 이 셋중 어느경우인지 모르나 그 가족이 다 멸할 정도라면 집안도 대단했을 것이고 구족을 멸했다니 당연히 남아있을 가족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비담이 미실의 아들이라면....
지금 선덕여왕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실궁의 모든 인물이 죽어야 되는 상황이다. 비담이 미실의 아들도 아니고 고아가도 아니었다면 그의 집안은 어떤 집안이었을까?
그러나 역적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 천광공편에 보면 선덕여왕이 몹시 아플 때 비담과 염장이 모반을 했다는 기록과 함께 김유신이 진덕여왕을 도와 반란군을 격퇴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비담의 난

비담은 (645)에 상대등이 되었다.

(647) 1월에 염종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킨다. 비담은 상대등에 임명된 인물로 당시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았다. 그 때문에 그의 반정엔 많은 군사가 참여하였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가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다.

왕은 김춘추, 김유신과 함께 월성에 본영을 설치하고 비담의 반란군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비담의 초기 반란은 실패하였다. 이에 비담은 반란군을 이끌고 명활성에 들어가 양 군대는 10일간이나 서로 전투를 벌였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이 반란군에게 말하기를, “별이 떨어지는 곳에 반드시 피를 흘린다 했으니 이것은 여왕이 패할 징조이다.”라고 해 반란군의 사기가 오르고 월성 군사들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졌다.

선덕왕은 그런 형세를 전해 듣고 몹시 불안해했다.


이때 왕을 안심시키고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유신이 한 가지 계책을 써서 상황을 역전시켰다.

유신은 다음 날 밤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연에 매달아 불을 붙여 공중으로 날려 보내니, 떨어진 별이 마치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듯했다.

 “어젯밤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이튿날 아침 이렇게 소문을 내고 백마를 잡아 제를 지내니 비담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지고 선덕왕의 군대는 사기가 올라갔다.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유신은 비담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너뜨렸고 결국 난은 진압되었다.
김유신과 알천등의 활약으로 내란은 종식되었다.

 마침내 비담 등이 패해 달아나는 것을 추격해 진압하고 주모자의 9족을 멸하였다.

내란을 종식시킨 일등공신은 김유신이다.

당시 도성의 병력은 반군보다 열세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김유신의 뛰어난 전술에 밀려 반군이 궤멸되었다.


『삼국사기』열전 김유신전에는 선덕여왕 16년, 선덕여왕의 말년이자 진덕여왕의 원년이 되는 해에 비담과 염종이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고 하였다고 나온다.


비담은 왜 난을 일으켰을까?

비담은 당시 상대등으로서,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없을 때, 가장 먼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런 막강한 세력을 가진 비담이 난을 일으킨 것은 선덕여왕의 후계자가 이미 진덕여왕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여성왕의 취임을 반대하던 상대등 비담과 그의 무리 염장이 반란을 일으켰고 비담은 선덕여왕의 통치 자체에 대해서도 불만이었다.

반정의 명분은 여왕이 정치를 잘못하여 나라가 피폐해 졌다는 것이었다.


선덕여왕과 비담의 난


비담이 여왕을 폐위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선덕여왕의 죽음으로 김유신쪽 세력이 모든 정치권력이 장악할 것을 우려해 난을 일으켰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선덕여왕은 비담의 난이 진압되기도 전에 숙환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이 왕의 엄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병환이 위독하자 후계문제가 대두되었고 화백회의에서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비담은 선덕여왕을 반대하여 폐위하는 것 보다는 이후의 일을 도모하기위한 반정이었다고 본다.


선덕여왕 이후에는 김춘추와 가야 멸망 이후 신라의 새로운 김씨로 편입된 가야 왕실의 후손 김유신이 손을 잡고 일종의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된 구귀족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반란의 명분은 여왕의 통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선덕여왕은 즉위 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앓아누웠고 정사를 잘 챙기지도 못했다. 거기다 전쟁은 계속 이어져 백성은 불안에 떨었고 그런 와중에 645년 황룡사대탑을 건립하였다.그러니 자연히 백성들의 원성과 불만이 뒤따랐다. 

계속되는 전쟁 중에 엄청난 인력과 자원이 드는 대탑의 건립이 반정세력에게 명분을 주고 말았다. 선덕왕은 이미 병을 앓고 있던 몸인데다 설상가상으로 반정의 소용돌이마저 몰아치자 병이 악화되어 내란중인 1월8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비담의 난 이후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은?



그러나 승리는 결국 김춘추 ·김유신에게 돌아가, 이들이 중심이 되어 더욱 강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에 필요한 여러 시책들이 실시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귀족연합체제를 이루던 상대(上代)가 막을 내리고, 중대(中代)가 시작되면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졌다. 결국 이 난은 신라 상대 말기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과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던 왕실세력의 싸움이었고, 여기서 김춘추 ·김유신 등의 왕실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장차 신라 중대 왕실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선덕왕의 영험한 지혜를 믿던 백성을 달래기 위해 실권자 김춘추가 난국타개를 목적으로 진덕여왕을 왕위에 앉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선덕여왕 드라마에서 문노와 비담의 관계는 아버지 같은 사부님이며 미워할 수 없는 원수지간이다.
많은 화랑들이 문노의 제자였으므로 어쩌면 정말 비담이 문노의 제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노는 69세에 죽었으니 드라마 속에서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이므로 비담이 키워준 아비와 같은 스승을 해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비담과 선덕대왕이 무슨 관계가 있는 사이였을까...
그러나 많은 책들을 찾아보았지만 아무 기록이 없으니 참 답답하다.
그저 드라마에서 작가가 스토리를 재미있게 엮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비담은 어떻게 화랑이 되었을까?


과정이 어찌되었든 비담이 화랑출신이었을 것이라는 상황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상대등이 되었고 난을 주도할 만 했다면 뛰어난 무인이 아니었을까?



물론 김유신이 풍월주가 되었을때 비제가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보종이 김유신에게 양보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종과 김유신은 아주 관계가 원만했으며
보종이 김유신을 아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선덕여왕보다는 미실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또한 조연들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다.

구성과 진행속도도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큼 긴박감이 있다.


선덕여왕 드라마는 앞으로 비담을 어떤 인물로 만들어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