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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문화공간/단순한 호기심

미생은 어떻게 풍월주가 되었을까?


 

옥진의 손자요.
대원신통이라.
아들 백 명에 낭도가 만 명,
 잘 먹고 지낸 부귀 화류의 일생이로다.

화랑세기에서는 미생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선덕여왕에서 보면 풍월주의 자리를 놓고 생사를 건 결투가 이루어지는데....

과연 미생은 어떻게 풍월주가 되었을까?


화랑세기에 의하면 미생이 10세 풍월주가 되었다고 전하는데 아마 미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생은 미실과 친남매간이다. 누나인 미실궁주가 진흥왕에게 큰 총애를 받게 되니 미생공도 여러 차례 궁궐에 불려가 태자들과 함께 배웠으며 용모가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려 태자들도 총애하였다.

춤을 잘 추어 사도태후(미생과 미실의 이모)는 여러 공주들에게 춤을 가르치게 했으며 미생공을 집안의 풍류 나비라 하였다.


미실은 미생이 12살 때 사다함을 좇아 낭도가 되도록 명하였다. 말에 올라타지도 못하는 미생이 낭도가 된 것은 미실 때문이었고 사다함도 부득이 허락하였다.

문노가 자력으로 말을 타고 칼을 쓰지 못한다고 꾸짖자 사다함이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제 애인의 동생입니다. 용모가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여러 사람을 위로할 만 하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사다함 이후에 세종공이 미생에게 풍월주 자리를 물려주어 미실을 기쁘게 하고자 하여 전방화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때는 미실이 설화랑을 총애하였으므로 미생은 부제가 되지 못하였다.

사다함과 세종의 부제였던 설화랑(설원랑)이 7세 풍월주가 되었다.

7세 설화랑부터 미실의 힘이 작용하게 되었다. 미실은 진귀한 하사품을 낭도들에게 주어 설원랑이 몇 명의 심복을 거느리게 되었다. 또한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 준화를 설원랑과 혼인시켜 낭도들이 불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생은 설화랑의 부제가 되었다가 마침내 10세 풍월주가 되었는데 36살이었다.

미실은 뇌물을 써서 미생공의 입지를 세워주고자 하였고 이득을 좋아하는 자들이 많이 와서 붙었다고 화랑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내가 13세에 전방화랑이 되어 16세가 되기 전에 풍월주가 될 줄 알았지 어찌 36세에 풍월주가 될 줄 생각 했겠는가?”

하며 미생공이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미생공은 3년간 자리에 있다가 부제로 있던 하종에게 물려주었다.

부귀한 환경으로 아랫사람의 사정을 알지 못하였고 여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여 신망이

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문하에서 낭도가 많이 나왔으므로 감히 아무도 배신하지 못했다.


미생공은 처첩이 많고 자식이 백 명이나 되어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생공은 출근할 때마다 여러 명의 아이를 데리고 부서에 가 종일토록 놀다가 돌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미생은 어머니와 누나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지극했다고 한다.

“공은 미목에 맑게 빼어나고 말을 하면 여운이 남았다. 남도에 갈 때마다 유화 중 목숨 바치기 원하는 자가 백 명, 천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미생공이 한번 곁눈질해서 좇아오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고 『미생기』에 기록되어있다.

평상시에 얼굴과 눈썹화장을 하고 노란 치장을 하니 그 향락이 천자보다 나았다. 진나라 사신은 상국에도 이 같은 재상이 없다고 하였다.

어머니 묘도가 미생에게 물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색공하는 신하로서 총애와 사랑을 극진히 받았으나 네가 누리는 부귀정도는 아니었다. 네가 아직도 부러운 것이 있느냐?”

이에 미생이

“숙모(사도태후)에게는 화문만 못하고

 누나(미실)에게는 설원(설원랑)만 못하고

 낭도에게는 문노만 못하니 제가 어찌 부러운 것이 없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묘도가 웃으며 말했다.

“세 사람 역시 너를 부러워할 것이다.”


이상이 미생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 아이는 제 애인의 동생입니다. 용모가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여러 사람을 위로할 만 하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미생이 낭도가 되고 풍월주가 된 것은 미실의 권력 때문이었고 화랑으로서의 기질은 전혀 없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겠지요.


위의 사진은 mbc 선덕여왕홈페이지의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