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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문화공간/단순한 호기심

미실, 출생부터 죽음까지

미실에 대한 의문 을 풀려면?
 

먼저 기이한 신라사회의 남녀관계와 혼인형태 를 알아야 한다.
 


신라의 남녀관계와 혼인형태

신라는 근친혼을 통해 지배세력들이 그들의 사회 정치적 지위를 지켜간 사회였다. 사통(私通)관계나 아내 상납, 또는 남의 아내를 빼앗는 일도 있었고 왕에게 여자를 제공하는 색공의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유부녀나 처녀에 관계없이 여자가 귀족이나 왕에게 색사로 봉사하는 일이었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기이하고 다양한 형태의 남녀관계와 혼인 형태가 존재했다. 그러면서도 배우자는 한 명, 처․첩을 엄격히 구분하고 적자와 서자를 구별하여 골품을 차등화시켰다.


마복자란?

당시 신라는 부계계승 사회였고 여자들은 관직을 갖거나 화랑, 낭도는 될 수 없었지만 재산은 물려받을 수 있었고 화주(풍월주의 아내), 봉화(낭도의 딸들), 유화(화랑도에 속한 서민의 딸들)로 화랑도와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봉화 중에서 풍월주의 총애를 받으면 봉로화라 하였고 봉로화가 되어야 낭두의 처가 될 수 있었다. 낭두의 처가 되어 아들을 낳은 여자를 봉옥화라 하였다. 낭두들은 모두 상선이나 풍월주의 마복자로 구성 되었으며 만약 마복자가 되지 못하면 낭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마복자 풍습: 배를 문질러서 낳은 아이라는 뜻이다. 신라 사회에만 있던 풍습으로 집단의우두머리는 부하중에 임신한 아내가 있을 때 자기 처소로 들여 살을 맞대고 정을 통하여 살게하여 태어날 아이와 인연을 맺는다. 성적 접촉으로 이상한 관계를 맺는 기이한 풍습이다.


 

인통이란?
신라왕실에 왕비나 후궁을 공급하는 혈통을 뜻한다.

전통사회에서 약20%는 아이를 못 낳고 약20%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진골정통(지소태후 계열)과 대원신통(미실의 외할머니 옥진을 종주로 모심)이라는 인통으로 혼인이 이루어 졌고 국왕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관계였다. 철저하게 여자에서 여자로 이어지는 모계계승이며 남자들은 한 대에 한해 어머니의 인통을 이었다. 용수와 춘추는 부자지간 이지만 인통이 다르다. 용수는 어머니지도부인으로 인해 대원신통이 되었고 춘추는 어머니 천명으로 인해 진골정통이 되었다.



미실은 어떤 인물이었나?

  출생 미실의 외할머니는 대원신통의 직접적인 종주라고 할 수 있는 옥진이다. 옥진의 딸 묘도가 2세 풍월주 미진부와 사통하여 낳은 딸이 미실이다.

  외모 미실은 용모가 절묘하고 풍만하였으며 명랑하고 아름다워 완벽한 미모와 몸매를 갖고 있었다.

 
  색사 외할머니 옥진은 미실에게 전문적인 방사기술을 가르쳤다. 옆에 붙어 앉아서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도 가르쳤다.


세종(전군)은 진흥왕의 동생이지만 아버지가 달랐다. 그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세종이 자라자궁중의 미녀들 중에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고르라 했는데 세종이 선택한 여자는 미실이었다. 옥진은 미실을 진흥왕의 후궁으로 삼으려하였으나 미실은 세종의 부인으로 궁중에 들어간다.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색사로 세종(전군)을 어지럽게 했다는 구실을 붙여 미실을 궁 밖으로 내친다.
세종(전군)을 섬긴 것 외에는 아무 죄도 없었던 미실은 눈물을 흘리며 쫓겨난다.

사다함 화랑 사다함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미실. 일방적인 색공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즐거움을 알게 된 미실은 진흥왕을 찾아가 결혼 승락을 받는다.

사다함이 대가야정벌전에 참가하여 돌아오면 결혼하기로 굳게 약속을 하지만 미실은 지소태후의 명으로 다시 입궁을 한다. 이유는 세종(전군)이 상사병으로 식음을 전폐했기 때문이다.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사다함은 세종의 부인이 된 미실로 인해 상사병으로 죽는다. 미실이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는 사다함이었다.
사다함이 죽은 후 임신한 미실이 낳은 아들이 하종이다. 하종은 미실과 세종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사다함이 죽은 후,
미실은 색정과 권력욕만 남은 무서운 여인 으로 완전히 변해버린다.


 
미실은 세종의 부인이었으나 진흥왕에게 색공을 바친 이후 진흥왕은 미실을 사랑해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미실을 왕후궁 전주로 삼았는데 그 지위가 왕후와 같았다. 미실은 문장을 잘 해 진흥왕이 조정에 나가 업무를 볼 때 옆에서 모시며 문서를 참견했다. 미실은 조야의 권세가 미실이 살았던 옥진궁으로 들어가게 했고 대원신통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미실은 진흥왕과 태자 동륜을 모두 상대하였고 세종은 미실의 신하처럼 복종했다.

세종이 공을 세우게 하고 풍월주가 되어 지방에 가 있을 때 미실은 진흥왕을 움직여 원화가 되어 세종을 풍월주에서 물러나게 한다. 미실에게 충실했던 세종은 부하들에게 자기의 옛 부인이 원화가 되었으니 복종하라고 명령한다.

태자 동륜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으면 태자빈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사도부인이었고 동륜이 사고로 죽어버린다. 진흥왕 사후에 금륜과 관계하도록 한 사람도 사도태후였다. 상상할 수 없는 문란한 성관계가 이루어진 사회였다.

미실이 숙부인 진흥왕과 관계하는 것이 고대 신라에서는 불륜이 아니었던 셈이다.

진흥왕, 금륜, 진시왕모두 그 죽음이 여색에 빠진 이유였던 것을 보면 당시의 인통에 의한 결혼풍습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색을 지나치게 밝히는 사회였고 정조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성과 결혼과 남녀관계 이 모두가 혼란했던 것이다.

미실은 진흥왕과 세종 사이에서 적당한 계략으로 입지를 다지며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세종이 입궁해서 살 수 있도록 하여 사도왕후와 함께 내정을 손에 쥐었으며 세종, 설원, 미생이 정권을 장악하게 하여 권력을 키워나갔다.


지소태후 사후에 진흥왕이 여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을 때 왕권을 행사한 사람은 미실의 숙모이며 진흥왕의 부인인 사도태후다. 진흥왕이 병으로 죽자 미실과 사도태후는 이를 숨기고 후일을 도모한 후 진흥왕의 둘째아들 금륜을 왕위에 세웠으니 그가 진시왕이다. 

미실은 진흥왕의 죽음을 권력 확대의 기회로 사용한 것이다. 이미 미실과 사도태후로 인해 왕권을 상실한 진시왕은 색사를 즐기며 미실을 멀리하고 왕후로 삼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사도태후와 미실이 힘을 합쳐 진시왕을 내 쫓고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을 왕으로 세우는데 그가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이다.



진흥왕의 폐위에는 문노의 지지가 필요했다. 미실은 종형제 윤궁을 문노와 맺어준다. 문노의 어머니는 가야국의 공주였지만 아버지의 신분이 낮았으므로 윤궁과 신분이 맞지 않았다. 거사 후 미실은 문노를 진골로 승격시켜 정식으로 혼인시켰다.

미실은 애인 설원랑을 7세 풍월주로 삼고 동생 미생을 부제로 삼아 보좌케 하고 낭도들에게 진귀한 하사품을 내려 복종하게 하였다. 설원랑이 먼저 풍월주가 되게 하고 문노가 그 뒤를 잇게 하여 설원랑의 아래 서열이 되게 정리하였다.

설원랑은 미실에게 무조건 복종하였고 자신의 낭도들과 함께 미실을 항상 호위하였다.


진평왕이 즉위했으나 어린나이였으므로 미실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7세 풍월주 설원랑, 10세 풍월주는 미생, 11세 풍월주가 세종과 미실사이에 태어난 아들 하종, 16세 풍월주가 미실과 설원랑 사이에 태어난 아들 보종이었다. 지소태후 다음으로 풍월주의 임명에 힘을 발휘한 사람은 미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평이 즉위했을때 미실은 32세였고 열세 살 아래인 진평에게 ‘신국의 도’라는 명목으로 성교육을 시켰다고 하니 신라에서 국왕의 남녀관계는 왕실의 번영을 위한 필수적이었고 미실에 의해 대원신통은 왕가보다 높아졌다.


미실은 어떻게 죽었을까?

 진흥, 진시, 진평의 세 왕을 모신 미실은 이상한 병(奇病)에 걸렸고 설원랑은 밤낮 옆에서 간호를 하였다.


설원랑은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마다 빌다가 마침내 병에 걸려 미실보다 먼저 죽는다. 설원랑이 죽자 미실은 자기의 속옷을 넣어 장사지내고 슬퍼하였다고 하는데 설원랑의 미실에 대한 마음은 참 대단한 사랑이다. 곧 이어 미실은 58세에 세상을 떠났다.


족보가 없는 신라인

신라왕조신록을 보면 고대 신라인들은 한 마디로 족보를 정리할 수 없는 가족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왕족과 귀족, 그리고 그 주변의 여인들이 사통으로 자녀를 낳았으며 남녀불문, 기혼, 미혼도 따지지 않는다. 모두 동시에 여러 사람과 관계하는 특이한 남녀관계가 이루어졌고 원하는 사람과 자유로 관계하였던 것 같다. 성관계가 아주 문란하여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에는  순결이라든가 조광지처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에 관한 가치관 자체가 달랐다.

선덕여왕에서는 미실만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드라마를 만들어져 있다. 사실은 그 당시의 모든 남녀관계가 문란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선덕여왕에게도 세 명의 남편이 있었다. 왕위에 오른 당시의 남편은 김용춘 이었으나 삼서제도에 의해 흠반과 은제가 남편이 되었는데 세 명 모두 유부남이었다. 선덕왕이 그들을 원했기 때문에 그들은 본부인을 버리고 선덕왕을 섬겨야 했던 것이다. 삼서제도란 왕녀가 자식을 가지지 못할 때 남편을 셋 얻게 하는 신라의 전통적인 제도인데 남의 배우자를 빼앗아 와도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왜 선덕여왕은 유부남만 선택했을까? 그런 이상한 시대도 있었구나...하고 넘어갈 수밖에...

선덕왕은 자식을 한 명도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