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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문화공간/단순한 호기심

문노는 69세에 죽었다.

 

 문노는 538년에 태어나서 606년에 죽었다고 합니다.

 향년 69세... 아주 오래 살았습니다.

 지금의 나이로도 69세라면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나이인데요.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오래 산 것입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문노는 벌써 죽었죠.

그러니까 스토리를 엮어나가다 보니 문노를 일찍 죽여야 했던 모양입니다.

원래 그렇게 적당히 역할을 충실히 하고 사라져 주어야 하는 게....

드라마 속에서 배우들의 운명이겠지요.

 

그렇다면 문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신라의 화랑도를 말하려면 문노라는 이름을 빼놓은 수 없다고 신라왕조신록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노는 모든 화랑의 스승이었고 화랑도의 토대를 세우고 조직을 완성한 사람이다. 그래서 신라가 삼한을 통일할 때 화랑이 그 중심에 있을 수 있었다.


문노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낮아 인정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출생, 

문노의 출생을 살펴보면 엄마는 가야의 문화공주인데 가야의 북국 왕의 딸이라고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야국 왕이 바친 여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노는 비조부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사통...

화랑세기에서는 문화공주가 호조공의 첩이 되었다가 비조부와 몰래 통정하여 문노를 낳았다고 하는데 호조는 비조부의 아버지입니다.

자, 이젠 이 머리 아픈 혈통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둘까요?


문노는 어릴 때부터 검술이 뛰어나고 용맹이 높고 의로운 일에 앞장섰습니다. 

사다함이 가야 정벌에 참전하며 동행을 청하자

  “어찌 어미의 아들로서 외할아버지의 백성을 괴롭히겠는가?”

  하며 참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문노의 휘하에는 가야출신의 낭도들이 많이 모였고 화랑도의 가야파는 문노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백제를 정벌할 때 17세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고구려를 정벌할 때도 공을 세웠습니다.

공을 인정받지 못하니 불평하는 부하가 있었는데요.

“무릇 상벌이란 것은 소인의 일이다. 너희가 나를 수장으로 삼고서 어찌 내 마음을 너희 마음으로 삼지 않느냐?”

하며 오히려 위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문노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차례 거절을 했습니다.



  미실의 남편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었을 때 문노를 찾아갔다.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으니 청컨대 내 형이 되어나를 보좌해 주시오.”

문노는 그 말이 매우 간절하므로 몸을 굽혀 섬겼다. 세종의 간언으로 진흥왕이 급찬의 직위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진흥왕의 왕비 사도부인도 그를 끌여 들여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문노를 도왔다.

  미실이 문노를 본사화랑으로 삼으려 했으나 문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시왕의 왕비 지도부인이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진시왕에게 청하여 일길찬으로 삼았으나 벼슬을 받지 않았다.


진시왕이 폐위된 후 조정에서 아찬의 벼슬을 내리니 비로소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의 실권자였던 미실이 그를 국선으로 삼고 제 8세 풍월주에 임명하고 환심을 사려하였으나 문노는 미실을 싫어하였다.


문노의 아내는 윤궁


윤궁은 거칠부의 딸이다.

거칠부가 누구인가. 내물왕의 5대손이다. 대아찬으로 있을 때 국사를 편찬하였고 고구려와의 전쟁에 출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상대등에 올라 국사를 도맡아 보다가 진평왕 즉위 1개월만에 노환으로 죽은 듯 하다고 신라왕조신록에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잠시...

선덕여왕에서는 미실의 계책으로 죽은 듯이 나오고 있으며 그로 인해 문노와의 사이에 문제가 심화되는 것으로 드라마는 진행된다. 드라마는 드라마니까....이정도로 해 두자.

 

윤궁은 동륜태자의 사이에서 윤실공주를 낳고 동륜태자가 죽은 후 5년 동안 과부로 지내던 중이었다. 아버지인 거칠부에 의해 윤궁의 재혼의 문제가 여러 차례  거론되었고 진시왕도 윤궁에게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윤궁은 과부로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문노와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유부녀, 이혼, 사통, 과부가 남녀관계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윤궁보다 문노가 지위가 낮은 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문노와 윤궁의 중매인은 미실이다. 윤궁은 미실과 종형제 간이었다.

주변의 여러 사람이 둘을 맺어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신분의 문제로 어려움이 좀 있었던 것 같다.

 

  문노와 윤궁,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났을 때는 서로 한 눈에 반해버렸던 것 같습니다.

  처음 윤궁을 만났을 때 문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낭주가 아니면 제게 선모는 없을 것이니, 국선에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첫눈에 반한거죠. 당시 문노는 마흔이 가까운 나이였다고 하네요.

  그 말은 그녀가 아니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부인 없어 국선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군을 그리워한 지 이미 오래되어 창자가 다 끊어졌습니다.. 비록 골을 더럽힌다 해도 할 수 있는데, 선모의 귀함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윤궁의 대답이었습니다. 윤궁이 한 술 더 떴죠. 두사람 사이에 혼인 말이 오갈때부터 윤궁은 문노를 사모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지만 윤궁은 골품이 높고 문노는 골품이 낮아 윤궁을 상전으로 모셨다고 하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윤궁은 미실과 문노가 대립하지 않도록 늘 다독거리며 때론 골품의 위업을 세워 명령하고 때론 아내의 입장이 되어 구슬리기도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뱃속의 아이를 내세워 미래를 도모하자는 말로 문노의 성질을 누구려뜨렸다.’


진시왕이 폐위되고 그 공으로 문노가 궁선의 자리에 오르면서 아찬의 지위를 받았다. 그래서 골품이 그녀와 같아졌다. 그 때 윤궁은 매우 좋아하며 진평왕을 찾아가 문노의 정식부인이 되기를 청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같이 산 것은 후견인이었다고 하네요. 참 기이한 남녀관계가 아닙니까? 그리고 진평왕과 미실이 그녀의 청을 받아들여 결혼식을 치르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라왕조신록에서는 미실과 진평왕이 대립관계였다는 상황이 나오지 않습니다.


  결혼 직후 윤궁이 한 말을 한 번 들어볼까요?

“어제까지는 낭군께서 첩의 신하였으나 오늘부터는 첩이 낭군의 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군께서 첩의 명령을 받았으나, 이제부터는 첩이 마땅히 군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문노와 윤궁의 관계는 신라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부부관계였다 .비록 잠자리를 같이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아내의 골품이 낮은 관계로 남편이 아내의 신하로 있다가 남편의 골품이 높아지자 정식으로 혼인하여 신하가 아닌 남편의 자리에 오르는 특이한 풍습을 볼 수 있다.


  문노는 윤궁 외에는 그 어떤 여자에게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유화들조차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아주 특별하게 남녀관계의 윤리를 지킨 특별한 남자였다고 할 수 있죠. 문노는 술도 마시지 않고, 색을 즐기지도 않았답니다.


   그 후 윤궁은 국선의 아내인 선모로서 화랑과 낭도들의 아내들을 이끌었고 자기가 직접 손으로 옷을 만들어 낭도들에게 입히는 자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문노가 종기로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요. 윤궁이 입으로 종기를 빨아서 낫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화제가 될 정도로 금술이 좋았답니다.


"지아비를 얻을 때는 문노와 같은 사람을 얻어야 하고,
아내를 얻을 땐 윤궁과 같은 여자를 얻어야 한다"
하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합니다.

당시 부부상의 모델이었다고나 할까요.


두 사람은 슬하에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남 대강은 후에 제상의 자리에 올랐다고 합니다.


문노는 행복하게 살다가 69세에 죽었으며 윤궁도 그해에 죽었답니다.